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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12일 금요일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의 ‘빅 브라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는 지배자가 주민을 전적으로 통제하는 전체주의 체제의 상징이다. 오웰이 그린 사회에서는 모든 이들은 당국의 완전한 감독 하에 살아간다. “빅 브라더는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말로 텔레스크린 속 빅 브라더는 이 사실을 끊임 없이 주지시킨다. 서울의 도시철도공사는 소설 속 빅 브라더까지는 아닐지라도 그런 성향을 다소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한 가지 예는 에스컬레이터 두 줄 타기 캠페인을 들 수 있다. 에스컬레이터의 좌측을 바쁜 사람들을 위해 비워 놓던 전통을 지하철의 에스컬레이터 두줄 타기 캠페인으로 망가뜨렸다. 굳이 망가뜨렸다는 표현을 하는 이유는 도시철도공사의 이 캠페인이 에스컬레이터 문화를 올바르게 정착시키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혼란만 가져온 점 때문이다. 도시철도공사의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다수의 시민들은 왼 쪽을 바쁜 사람을 위해 비워 놓고 있는 가운데, 그 홍보의 영향인지 나란히 가로막고 서 있는 사람들도 더러 생겼다. 그러다 보니 시간 절약이 필요해 에스컬레이터 왼쪽으로 걷는 사람들과 막아 선 사람 간에 무언의 신경전이 벌어진다. 도시철도공사가 엄마와 아이가 나란히 손잡고 에스켈레이터를 가로 막고 있는 포스터를 붙이고 캠페인을 벌인 결과치고는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도시철도공사의 이런 캠페인이 시민들의 예절과 관습을 섣부르게 재단하는 결과가 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 다른 예는 일부 전철역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는 내내 들어야 하는 녹음 목소리다. 필자가 이용하는 역에서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뛰거나 장난치면 다칠 염려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근엄한 목소리가 벌써 여러 해 동안 한 시도 빠짐 없이 반복해서 울려 퍼지고 있다. 더욱이 안내방송은 상, 하 양 방향의 에스컬레이터에서 엇박자로 동시에 흘러나오고 있는데, 이 소리는 마치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처럼, “도시철도공사는 시민들이 어린 아이마냥 뛰거나 장난치지 않는지 늘 보고 있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필요한 조치였을 것으로 생각하면서도 녹음 방송을 수년째 똑같이 반복하는 것은 너무 안이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력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이런 식보다는 좀 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일례를 들자면 몇 년 전 일본 도쿄에 출장을 갔을 때 출근시간에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느꼈던 인상은 보다 인간적이었다. 출근 시간의 혼잡 속에서 환승역은 수 많은 출근 시민들로 붐볐는데, 지하철 역 근무자가 승객의 동선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서 시민들의 흐름이 서로 뒤엉키지 않도록 안내하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짐작하건대 그 지하철역 특유의 구조와 흐름에 맞게 사람들의 동선을 좌, 우로 안내하여 정착시키려는 것 같았다. 이와 비교하자면 우리 지하철은 획일적으로 우측 통행을 유도하는 화살표와 발자국 표시를 붙인 것만으로 시민들의 통행 습관을 재 정립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각 지하철역마다의 구조와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에 따른 동선 흐름의 차이를 반영하지는 못한다.

소설 속 빅브라더는 늘 감시하며, 반복적인 선전으로 시민을 지배한다. 서울의 지하철도 이제는 시민들이 출근 길 아침부터 이런 느낌을 받게 하기보다는 보다 자율적인 민주 시민으로 대접받는 느낌이 들도록 안내 방법을 개선했으면 한다.


2010. 1. 12 드러커리즘 연구소장 문근찬

변화에 대한 보수주의 관점은 무엇인가?

최근 강기갑 의원의 국회폭력행위와 전교조 시국선언 교사, MBC PD수첩 보도에 대한 일련의 무죄판결로 많은 논란이 일었다. 이들 논란의 핵심에는 보수와 진보라는 가치관의 차이가 있다. 우리 사회는 특정 사안마다 보수냐 진보냐의 성향에 따라 찬성과 반대로 극명하게 갈린다. 하지만 정작 보수와 진보 그 자체의 진정한 의미와 구체적인 지향점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고, 무조건적인 반대와 거부로 일관한다. 이런 문제의식에 따라 우선 ‘진정한 보수’란 무엇인가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정치 차원에서 보수주의의 뿌리는 근대 보수주의 사상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에드먼드 버크(Burke Edmund)의 프랑스 혁명에 대한 비판에서 찾을 수 있다. 보수주의 사상가들의 성향은, 이성과 능력에 있어서 인간은 본원적으로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한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제도의 창출이나 사회의 재구성 과정에 미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보수주의는 급진적인 방법, 예컨대 혁명이나 쿠데타 등에 의해 사회가 변혁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특히 버크는 개혁자가 국가의 결함을 다룰 때, 마치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하는 심정’으로, 곧 ‘경건한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현대 경영학을 창시한 사람이라는 칭송을 받았던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의 저술 배경인 1930년대 유럽의 사회 변화를 특히 파시즘 전체주의의 허구성을 관찰하면서 보수주의적 신념을 갖게 되었다. 파시즘 전체주의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이성주의자들은 세상의 이치를 완벽하게 파악한 듯이 행세하며 반드시 절대주의자로 변한다. 그들은 자신이 곧 진리라고 선언하며, 이런 사고는 필연적으로 그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을 계몽 또는 복종시키고자 하는 의무감으로 이어지고,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인류의 행복에 반대하고 국가와 사회에 해를 끼치는 자로 간주된다. 이 점이 바로 파시즘 전체주의자들이 잔혹행위에 매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을 관찰하면서 드러커는 역사 발전은 보수주의적 관점에 의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드러커는 산업사회의 주역으로 떠오른 대기업에 대해 연구하면서, 기업을 비롯한 사회의 각 기관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을 책임 있게 사용하는 것이 보수주의의 요체임을 간파했다. 보수주의적 사상가들은 국가의 역할이 비대화 되지 않게 하고, 자율적인 개별 기관, 나아가 사회의 구성원인 개인의 자율성이 커지는 사회를 지향한다. 결과적으로 보수주의 사상가들은 ‘작고 강한 정부’를 추구한다. 모든 일을 정부가 관장하려는 시도는 잘해야 낭비만을 초래할 뿐이며, 잘못된 길로 가면 전체주의적 성향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일 드러커는 장자크 루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에 의한 구제’의 시대, 즉 국가가 모든 일을 도맡아 해결하려는 사조가 1970년대 언저리에서 종말을 고하고 이제 다원화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고 내다 봤다.

드러커에 의하면 보수주의란 현상을 고수하려는 성향이 아니다. 보수주의란, 모든 역사는 연속과 변화로 이루어지며 이 둘 사이의 조화를 통해 현재를 바탕으로 부단히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고민하는 사조를 말한다. 보수주의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지금까지 걸어 온 역사와 현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보수주의는 모든 것은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늘 재검토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변화의 방법에 있어서 만병통치식의 개혁안으로 일거에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한 번에 하나씩 손에 익은 도구로 개개의 문제를 해결해간다.

이런 점에서 보수주의는 전체주의적 계획경제의 반대편, 즉 시장자본주의와 상응한다. 시장자본주의에서 국가는 기업이나 개인 등 사회의 구성 인자들이 각기 장점을 살려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자율권을 부여하는 체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추구하는 자유는 엄격한 책임에 의해 유지됨을 이해해야 한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스스로 이런 균형 감각을 갖고 있는지 늘 자문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사회에 급진적인 요구가 많아지는 것은 스스로 보수주의의 원칙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임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드러커는 ‘경제인의 종말’에서 이런 균형이 심하게 훼손되었을 때는 늘 전체주의라는 망령이 다시 나타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2010. 2. 8 뉴데일리 칼럼 게재

한국사이버대학 교수/ 드러커리즘 연구소장 문근찬

‘950 번 만에 합격한 운전면허’에서 우리 사회의 관료주의를 본다.

무려 950번 만에 운전면허 필기(학과)시험에 합격한 60대 할머니가 기능시험을 통과했다는 이야기가 화제다. 이 할머니의 이야기는 지난 해에 이미 운전면허 필기 시험을 775 번 낙방했을 때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되었었는데 이제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 화제의 주인공인 한 할머니가 지난 2005년부터 무려 5년 간 950번의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도전한 끝에 합격을 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그 동안 주말과 국경일을 제외하면 거의 매일 운전면허시험장을 찾아 시험을 치렀다는 것과, 그리고 그 동안 들어간 인지대를 포함한 비용만 해도 얼추 2천 만원 가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야기를 다루는 대부분의 매체들의 논조는 하나의 가십거리로서 주인공인 차 할머니의 불굴의 집념을 칭찬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본질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한국인 특유의 도전정신 문제가 아니다. 그 쪽보다 필자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지독한 관료주의를 본다. 이 이야기에서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은, 차 할머니가 5 년 간 거의 가망 없는 시험을 수 백 번 치르고 낙방하는 동안,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국내 방송과 해외 토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동안, 이 시험제도에 관계된 이들은 그저 평소대로 시험 감독만 기계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운전면허 불합격 횟수로서 기네스 북에나 오를 만한 이런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결국 이 이야기의 숨은 주인공인 운전면허 관계자들은 법규를 지켰으므로 처벌은 할 수 없으되 도저히 창의력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무대책의 관료주의의 전형을 보였다.

“면허증을 꼭 따 직접 운전한 차로 장사를 하고 아들, 딸 집에도 놀러 가고 싶다”는 한 노인의 소박한 희망을 좀 더 일찍 실현시키기 위한 무슨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면 차라리 그 할머니를 설득하여 지레 포기시키는 것이 나았지 않았을까? 혹은 그 집념을 포기 시킬 수 없었다면 어느 시점에선가 특별 지도라도 해서 좀 더 조기에 합격을 시키고자 배려하는 대책이 나왔어야 한다. 혹은 이 사례를 계기 삼아 운전면허 시험 제도를 보다 실용적으로 바꾸고, 이해력 부족으로 필기 시험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한 방안을 포함하는 제도를 입안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무후무한 운전면허 필기시험 낙방 기록이 세계 토픽이 되었고, 이 이야기를 통해 한국인은 단지 정해진 규칙을 기계적으로 지킬 뿐, 약한 개인이 한 없이 고통을 당해도 꿈쩍하지 않는 융통성 없는 관료주의적 이미지가 박히게 되었다.

전 세계적 경쟁에 노출되어 있는 기업체들은 고객을 섬기며, 고객에게 서로 차별화 된 가치를 제공하는 것으로 경쟁한다. 따라서 기업체는 비교적 형식주의, 안정과 무사고를 지향하는 관료주의가 자리잡을 틈이 없고, 부단히 혁신을 해서 고객 가치를 높이는 일이 체질화 되어 있다. 그러나 공공기관은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고객에게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할 방법을 연구하지 않는다면 점차 관료주의적 무사안일이 자리 잡을 수 있다. 앞의 이야기를 어느 시골 노인의 얼빠진 이야기라고 실소에 부칠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시민을 위한 개선과 혁신 방안이 무엇이었는지 고민하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했다면 이런 부끄러운 해외토픽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드러커리즘 연구소장 2010. 1. 21 문근찬

중도실용주의가 담아야 할 정신적 가치

오늘의 우리 사회는 이념적 갈등과 경제 공황이라는 상호 관련된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 난국을 타개할 목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은 최근 중도실용주의를 다시 강조했다. 그런데 중도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그 단어가 주는 모호성으로 인해 좌와 우 모두에게 배척되는 양상이다. 대개의 반응은 좌와 우라는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회색분자 정도로 중도를 평가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그러나 이번 논의를 단순히 일시적인 정치적 수사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는 전환기에 이루어져야 할 노력의 하나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역사의 전환기로서 이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피터 드러커는, 전환기 이후의 사회는 오늘날과는 아주 다른 사고체계에 의해 사회의 정당성이 정의되는 사회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얼마나 다른가 하면, 그 시기에 자라난 젊은이들은 바로 전 세대인 오늘날의 혼란과 이념 갈등을 도저히 이해 못할 현상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다른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중도실용의 콘텐트를 논한다는 것은 현재 우리가 추구해온 자유민주주의가 새 시대에 대비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부족한 부분은 자본주의의 절대선인 양 추구되어 온 경제지상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일찍이 드러커는 ‘경제인 개념’ 즉 경제지상주의의 맹신이 자본주의 사회가 청산해야 할 문제의 뿌리로 보았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을 써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윤을 추구하면 사회는 성장하고 사람들은 행복하게 된다고 했다. 실로 이 경제인 개념은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게만 하면 사람들의 불평등쯤은 감내해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 경제지상주의가 새로 도래할 전환기 이후의 다원화된 사회에도 정당하게 작동할 것인지, 즉 정당한 사회를 만드는 원리가 될 것인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물질적 풍요를 저급한 가치인 것처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는 물질적 성장이 사람의 정신적 풍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신념의 산물이며, 우리가 절대빈곤에서 지금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한 것은 바로 시장 자본주의의 덕이다.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에 비해 자본주의는 시장 메커니즘이라는 자유의 속성을 그 안에 품고 있다는 분명한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공황 등 사람들의 평등 문제가 첨예하게 대립할 때 이 자본주의적 가치는 자주 곤경에 처한다.

역사를 통해서 배운다는 생각으로 유럽의 1930년대를 보면 현재의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의 결과 150 여 년 간 지속되어 온 경제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마르크스 사회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절대주의 등 온갖 ‘이즘’에 빠져들었다.

드러커는 그의 초기 저술 ‘경제인의 종말’에서 서구 사회가 파시즘 전체주의에 빠져드는 과정을 분석했다. 드러커에 의하면, 오랫동안 사람들의 신념으로 자리 잡아 온 중상주의적 ‘경제인의 개념’이 자유와 평등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에 실망한 대중은, 설상가상으로 세계대전과 대공황으로 극심한 실업이 발생하자 자본주의 대신에 일순간에 이 난국을 진정시킬 비법을 갈구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대신 사회적 진공상태를 채우기 위해 등장한 비법이 바로 파시즘 전체주의라는 ‘폭탄’이던 것이다.

파국을 막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행동은 없이 좌와 우로 나뉘어 완강히 저항만을 할 뿐이었다. 이는 현재의 우리 사회와 우려스럽게도 매우 닮은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순수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첨예한 갈등으로 사회가 파국을 맞게 될 가능성보다 이념의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지가 중요한 논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논의되고 있는 중도실용주의란 경제지상주의로 치달아 왔던 그동안의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반성이 핵심내용이 되어야 한다. 즉 중도실용주의는 자본주의의 강점에다가 ‘기능하는 사회’라는 핵심적 요건인 ‘자유와 평등’이 잘 결합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비록 경제성장이 다소 더디더라도 사회 구성원이 총체적으로 좀 더 화합하고 행복해지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방향전환을 말한다.

한마디로 중도실용주의의 핵심 가치는 경제지상주의를 넘어 ‘도덕적인 규범이 살아 있는’ 시장 자본주의가 되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이윤 추구와 아울러 실업 문제 등 사회적 책임을 생각하는 기업가, 지나친 보수의 격차는 사회 갈등의 원인임을 자각하고 양보할 줄 아는 전문가 그룹과 경영자층,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과 사회에 어떻게 공헌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이 사회를 지탱할 생산성을 내는 책임 있는 근로자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사회가 중도실용주의가 추구하는 사회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현재 논의되고 있는 중도실용주의는 다가오는 전환기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될 새로운 ‘정신적 가치’를 담는 그릇이 되었으면 한다.

드러커리즘 연구소장 문근찬

2009. 7. 13

경제위기 처방의 빠진 연결고리 – 기업가정신

지난 해는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시장의 위기가 전세계를 덮었던 한 해였다. 여러 전망이 제기되고는 있지만 경제위기의 한파는 어디까지 미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아직 진행 중이다. 흔히 이번 경제 위기를 1930년대의 대 공황에 견주기도 한다. 그만큼 경제불황의 골이 깊다는 것인데, 실제로 주위를 돌아 보면 갑작스런 경제불황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생계의 위기에 직면하는 사람들이 차츰 많아지고 있다.

경제위기의 파고가 높다 보니 그 처방에 대해서도 각양각생의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거시경제적 처방들과 공공 사업을 통한 단기적인 일자리 만들기 같은 시책들이 왠지 임시방편과 같이 믿음이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위기가 대공황에 비견될만한 것이라면 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위해서 오늘날의 경제위기가 내포한 문제와 근본적인 처방에 대해 80년 전 대공황 시대의 역사를 통해 배울 필요가 있다.

80년 전 서구의 대공황과 오늘날의 금융위기의 원인은 다르지만 그 결과 사람들이 믿어 왔던 사회경제시스템에 실망하고 좌절에 빠졌다는 점에서는 양자가 동일하다. 1930년대 말의 유럽은 전쟁과 대공황의 여파로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대부분의 시민들이 절망했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때와 닮아 가고 있다. 대학을 나오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청년 실업자는 계속해서 늘고 있고, 집세도 내지 못하는 수많은 자영업자들의 애환이 점차 깊어지고 있다. 이렇게 경제 불황이 심해짐에 따라 사회 속에는 적절한 역할과 일거리를 찾지 못하는 대중이 늘게 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얼마 전의 미네르바 해프닝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는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엉뚱한 선동에도 휩쓸리는, 마치 수용소 집단과도 같은 군중의 집단으로 변하게 된다는 점이 경제불황의 최대 문제점이다.

일찍이 피터 드러커는 대공황 당시의 사회상을 서술하면서 대중의 절망 문제를 다룬 바 있는데, 우리는 드러커의 저술을 통해서 오늘의 경제위기가 제기하는 문제의 의미와 해법을 모색할 수 있다. 드러커는 1939년 자신의 첫 저서인 ‘경제인의 종말’에서 경제공황과 파시즘 전체주의의 발흥을 분석하면서, 자본주의 시장 메커니즘에서 자주 공격 받는 이슈에 대해 진단했다. 이 책에서 드러커는 당시의 유럽 사회의 모습을, “국수주의적 긴장과 국제적 혼란 속에서 서구의 시민들은 전체주의를 혐오하면서도 서구문명의 자기파괴적인 무능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전체주의에 빠져들었다.”라고 요약한다. 대중의 절망감이 너무나 압도적이었기에 서구 시민들은 전체주의의 허구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파시스트의 대중선동에 넘어갔던 것이다. 모든 자유를 포기하더라도 당장의 절망감에서 벗어나고 싶게 하는 상황은 이렇게 역사를 바꿀 정도로 파괴력이 있다.

그런데 이런 역사적인 흐름에서 미국이 비켜 갈 수 있었던 것은 미국에서 과학적 관리법이 태동했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초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건너오는 노동자를 고용하여 대기업 공장들이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프레더릭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법을 만들고 보급함으로써 생산성은 50 배나 증가했고, 몇 년 후 미국의 노동자들은 급속하게 중산층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노동자들은 굳이 혁명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도 살만한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순환의 흐름을 제대로 탄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다. 한국의 탁월한 기업가와 근로자들은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기업을 일으켰으며 40년 만에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점을 높이 산 드러커는 어느 벤처 잡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세계에서 기업가정신의 최고 실천자는 바로 한국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자면, 이번 경제위기의 해법도 기업가정신의 재정립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결론적으로, 위기를 근본적으로 탈피한 후 맞을 새 시대는 사회에 대해 더욱 철저하게 책임을 지는 윤리적 기업가의 시대가 되어야 한다. 윤리적 기업가는 우선 경쟁력을 철저히 갖춰 고용능력과 사회를 지탱할 충분한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이며, 더 나아가 여력이 있다면 더 적극적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기업이다. 또한 종업원의 참여로 진정한 기업시민 의식을 일깨우고, 분식회계와 같은 비윤리적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는 기업이다.

국난 앞에 의병으로 나서 싸웠던 조상들과 같이 오늘의 경제 국난을 극복할 전위대는 진정한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한국의 기업가들이 되어야 한다. 희망컨대 한국의 기업들이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여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기업의 수가 지금의 두 배쯤으로 늘어난다면 우리가 처한 실업 문제를 비롯한 경제 위기는 저절로 해소되고 선진국형 경제로 진입할 수 있을 것이다.

원론적인 해결책이 늘 그렇듯이 이 처방은 중요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적용 가능하다. 전제조건이란 바로 기업가의 역할이 중요함을 인정해 주고 기업가를 존중하는 사회적 풍토를 말한다. 예컨대 기업가가 좀 더 경쟁력 있게 일할 여건을 온 나라가 합심해서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실상은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지탱할 부(富)를 창출하고 고용을 일으키는 기업가의 역할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인정은커녕 오히려 적대시 하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다. 사실 기업가정신을 북돋우는 일은, 환율의 방어나 금리 조정, 그리고 단기적인 일거리를 창출하는 온갖 단기 효과를 노리는 경제정책들보다 오히려 오늘의 경제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임은 경제학자가 아니라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경제위기에 대한 단기적 처방에 묻혀서 철저히 누락되어 있다.

2009. 1. 29

드러커리즘 연구소장 문근찬

외고 문제의 핵심은 공교육의 경쟁력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외고에 대한 논의를 보면 초점이 잘 못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외고가 나름대로 탁월한 성과를 내면서 외고에 입학하려는 경쟁을 심화시키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정부가 억제하려고 하는 사교육비 문제를 심화시켰다는 것이 ‘외고 폐지론’의 대체적인 논거인 것 같다. 이런 논의를 보면 예전에 고등학교의 평준화를 위해 무시험 진학 제도로 바꿈으로써 전국 각지에 자리 잡았던 명문고들이 일거에 없어졌던 역사가 떠오른다. 대개 이런 식의 대증적 처방은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 악화시키게 된다. 나름대로 특출하게 발전한 학교를 성장하도록 돌봐주지는 못할망정 싹을 없애 버리는 것이 과연 우리의 교육 정책이 되어야만 하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문제는 전반적인 공교육의 비능률에 있는 것이지 외국어고등학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공교육의 어두운 단면을 보이는 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세칭 명문고로 알려진 어느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실에서 선생님의 수업은 안 듣고 학원 진도에 맞춰 다른 책을 꺼내 놓고 공부한다는 것이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는 전통적인 사제의 도를 떠올리기도 민망하게 공교육이 제대로 작동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고교 학부형이 될 누구든 붙잡고 물어도 이런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아이들이 성적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도전해야 하고, 교사도 열심히 준비해야만 제대로 학생을 가르칠 수 있는 ‘살아 있는’ 학교를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이런 단적인 예를 보더라도, 최근 외고의 해법은 나름대로 경쟁력을 키운 학교를 없애는 데 잇는 것이 아니라 침체되어 있는 공교육의 경쟁력을 올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교육 행정의 문제는 수많은 요인들이 인과관계로 얽혀 있고, 이해가 다원화 되어 쉽사리 유일한 해법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증적 요법은 늘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므로 더디더라도 근본 문제를 공략하는 길만이 올바른 방향이다. 외고 문제도 교육을 하나의 산업 현상으로 보고, 그 속에서 공교육이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방향이 되어야 한다. 즉 공교육이 사교육과 정면으로 경쟁해서 우위에 서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근본 해법 중에는 중고등학교 교사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 우선순위에 포함될 수 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충분하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밤 늦게까지 학원을 전전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현행 임용고사 제도는 유능한 인재를 확보한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임용고사 점수가 곧 유능한 교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직책도 마찬가지지만 유능한 인재를 끌어오기 위해서는 채용 단계에서부터 유능한 인재의 풀(pool)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교사의 길을 가겠다는 사람이 사범대학에 들어가면 이들에 대해서는 졸업과 동시에 우선 교사로서 임용했기 때문에, 애초에 교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며 사명감을 갖고 사법대학에 진학하려던 우수한 인재를 유인하던 동기부여 효과가 있었다. 현재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비 사범 계 대학의 문제제기에 따라 지금은 학과를 불문하고 연 1 회 실시하는 임용고사를 거쳐 성적 순으로 교사를 채용한다. 결과적으로 사범대학을 나왔어도 임용고사에 합격하리라는 보장이 없게 되었다. 차제에 옛 제도를 복원하여 사범대학 졸업자는 교사 임용을 보장하는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그렇게 한다면 오늘날의 취업난과 교원 임용고사의 극심한 경쟁률로 미뤄볼 때, 교사 직에 사명감을 갖춘 유능한 인재들이 ‘스승의 길’을 걷고자 몰려들 것이고, 공교육은 사교육에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2009. 10. 29 드러커리즘 연구소장 문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