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근찬 한국사이버대 경영학부 교수ⓒ뉴데일리 2010.09.22
현대 민주사회는 공짜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구성원들의 협동을 이루어낼 수 있는 공정한 제도가 갖추어져야 하며, 그 구성원들은 또한 자유와 평등을 향유하는 시민으로서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이런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전제 하에 존 롤스(John Rawls)는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는 가장 적합한 원리는 무엇인가를 탐색했다. 롤스는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철학 교수로 있었는데 그의 정의(justice) 이론은 공정한 사회에 대한 연구의 고전에 속한다.
롤스는 자신의 정의 이론을 전개하기 위해 원초 상태(original position)라는 초기 조건을 가정했다. 원초 상태에서 구성원은 다른 사람이든 자신에 대해서든 누가 어떤 계층에 속해 있으며, 천부적 재능은 무엇인지 등 우월한 협상력을 가질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다고 전제되는데, 이를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 한다. 무지의 베일을 쓴 구성원은 이타적 생각이나 질투에 의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초기 조건 하에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헌법을 제정한다면 어떤 원칙을 세워야 하는가? 이 질문이 바로 롤스가 제시한 정의 이론이다.
롤스의 정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원칙으로 구성된다.
1.각 개인은 정치, 언론, 사상, 종교, 양심의 자유 등 기본 자유가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2.기본 자유가 보장된 조건 하에, 각자의 재능과 노력에 따라 직업과 지위에 결부된 불평등은, 그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공정하다는 조건 하에서 허용된다. 또한 그와 결부된 수입과 부의 분배는 가장 혜택을 못 받은 계층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제 1 원칙은, 기본권의 보장은 경제적 부의 분배 이전에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실제로 롤스의 정의론의 기본 전제이기도 한데, 이는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은 사회, 즉 시민이 자유나 평등이라는 두 가지 도덕적 권한을 행사할 능력이 없다면 민주시민으로서 정의의 원칙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떤 전체를 위한 효율이나 목적을 위하여 소수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제 2 원칙은 제 1 원칙이 지켜진 조건 하에 논의되는 것으로, 이는 다시 두 가지 원칙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첫째는 우선 직위, 직업의 선택 기회가 만인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롤스는, 사회 내에 존재하는 직위나 직책이 한도가 정해져 있는 일종의 제로섬(zero-sum) 재화이므로 특히 ‘공평무사한 기회의 배분’은 중요하다고 보았다. 롤스는 직업의 선택은 각자가 지닌 재능에 따라 적합한 직위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재능의 수준에 따라 차등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조건 하의 차등은 만인에게 이득이 되는 정당한 것으로 보았다. 예컨대 기업가정신이 있는 사람에게 기업을 경영하도록 함으로써 생산성을 올리게 되면, 그 본인이 가져 가는 인센티브를 제한 나머지는 모든 일반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둘째는 일단 직위, 직업이 결정된 상태에서 부의 분배는 가장 혜택을 못 받은 계층에게 가장 이익이 많이 가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롤스는 직위나 직책이 일단 결정되는 것은 매우 임의적인 특징이 있어서 일종의 자연적 복권(natural lottery)에 당첨되는 것과도 같은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가족 제도가 존속하는 한 가정의 형편에 따라 더 우수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등 직업이나 지위에 대한 기회의 완전한 평등이란 존재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와 같이 롤스는 직업의 선택과 부의 분배에 있어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법은 절대적인 평등에 있지 않고, 효율에 따른 불평등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를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이라 한다.
결론적으로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무엇인가 직업, 직위들 중에서 하나씩 선택하여 자신의 역할을 하는 정돈된 사회의 모습을 제시했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우월한 지위나 정보를 이용해서 자식의 자리를 마련해 준다면, 이는 롤스의 정의 이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정의 사회를 깨는 행위이다. 하지만 롤스의 제 2 원칙에서 보듯이, 공정한 절차가 지켜지는 한 능력에 의한 차등은 인정해야 한다. 더 나아가 비록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직업과 직위가 일종의 복권과도 같은 행운임을 인식할 때, 그런 직위를 얻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늘 배려하고, 부의 분배에서나마 보상을 하는 것이 정의라는 것이다. 이는 단지 도덕적 선의에 의해서 그리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무지의 베일을 쓴 사람이라는 공평한 초기 상태를 가정하고 사회의 틀을 짠다면 롤스의 정의의 원칙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무지의 베일 속에서 나 자신이 헌법 초안을 선택한다면, 자신이 최악의 경우에 처할 경우에 완전히 비참해지는 대안보다는 그런대로 견딜만한 대안을 선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시민들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로서의 직업과 직위 자체가 희소해지는 근본 문제를 안고 있다. 거기에다가 더하여 경쟁과 경제지상주의를 자본주의 경제의 성장원리로서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심화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와 공정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사회의 구성 원리가 우리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융합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롤스의 정의 이론은 직업 간의 소득 균형이나,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공정한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데 이론적 배경이 될 수 있다.
<문근찬 /한국사이버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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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29일 월요일
교육 백년대계와 법의 모순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교수, ©뉴데일리 2010.07.05
우리의 공교육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교육 문제는 그 당사자에 따라 너무나 상이한 이해와 해법이 얽혀 있어 교육 정책 당국마저도 때로는 자포자기 상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다소 엉뚱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한국 교육에 있어서 법 정의라는 잣대가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육이라는 백년대계의 문제를, 법원이 임용 평등이라는 밥그릇 다툼의 문제로 정의하면서 한국의 공교육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공교육 문제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교육열이 문제라고도 하지만, 그 교육열이야말로 6.25 전쟁 후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한국을 세계 10위권 경제로 일으켜 세웠다는 데는 다들 공감하는 바다. 그 교육열이라는 것이 소위 명문대에 가기 위해 수능 점수 올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로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거기에 맞추게 되면 그 해법이라는 것은 필경 수능 없이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게 하는, 경쟁 없는 입시정책을 추구하는 방향이 될 터인데, 오늘날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그런 식의 하향 평준화는 이만큼이나마 성장시킨 나라를 퇴보시키자는 말이나 다름 없다. 물론 좀 더 장기적으로 보면 이 문제는 아마도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는 세월을 좀 더 겪은 후에 우리 사회가 대학 졸업장보다 자신만의 특별한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더 낫다는 인식에 따라 서서히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면 명문 고등학교라고 박수를 보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며 가까운 장래에 바뀔 것 같지도 않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대학 간판 위주의 교육열을 탓해 보았자 대개 그 해법은 탁상공론이나 다름 없게 될 뿐이다.
필자는 현재의 공교육 문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공교육이 학원이라는 사교육에게 경쟁에서 밀리는 현상으로 본다. 공교육이 경쟁력을 잃으니 학생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믿지 못하고 학원을 더 믿으며, 학부모는 비싼 학원비 대느라고 고생이고, 또 학생들은 밤이 깊도록 학교공부와 학원공부로 고생이다. 물론 공교육의 목적이 단지 지식교육이 아니고 전인교육인데 학원과 비교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반론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는 과거의 공교육은 지식교육에서도 학원에 밀리지 않았고, 인성 교육 측면도 지금보다 나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공교육의 붕괴 현상은 학생들이 교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교사들이 자긍심을 갖고 있지 못한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필자는 어느 고교 수업 현장에서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안 듣고 자신의 학원 진도에 맞는 책을 펴 놓고 공부를 하지만 선생님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30, 40년 전의 고교 수업에서 이런 일은 상상이 안 되는 일일뿐더러, 만약 이런 일 발생했다면 그 학생은 체벌을 포함하여 엄한 징계를 받았을 것이다. 교육이란 거의 훈육(discipline)과 같은 말이다. 그러려면 교육자는 스승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이 있어야 한다. 이 차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늘의 교사들은 예전에 비해 교사로서의 자부심이나 사명감이 떨어짐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교사로서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학생의 행동에 대해 사명감이 있는 교사라면 당연히 그런 학생의 태도를 바로 잡아주어야 하고, 그러려면 스스로 학원 수업을 능가하는 교육을 하겠다는 투지를 보여야 할 것인데, 위의 예는 실망스런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가 이런 상태라면 지식교육뿐 아니라 공교육이 주장하는 바 중요한 목적의 하나인 전인교육인들 잘 될 리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서 복잡한 인과관계의 수 많은 논의들이 있겠지만, 필자는 문제의 일단에는 공교육을 책임지는 주체인 교사가 천직의식을 잃었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 되는데 법조계가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원래 공교육의 주체인 교사의 임용은 국립 사범대학에서 임용고사 없이 교원을 우선 채우고, 부족한 인력을 임용고사에 의해 충원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90년도 어느 땐가 국립 사범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우선 채용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이 제기되어 누구나 평등하게 임용고사를 치르도록 되었다. 또 2004년도에는 사범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 임용고사에 가산점을 주는 것이 위헌이라 하여 또 헌법소원이 제기되었고, 역시 위헌 판결로 가산점이 없어졌다.
필자는 사범대학 출신을 옹호할 마음은 없다. 다만 원래 사범대학은 대학 진학 시에 이미 교육자로서 뜻을 세운 사람이 가는 대학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공교육의 가치관을 잘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법리 상의 평등이 교육의 틀을 굳건히 하는 백년대계보다 중요한 가치를 갖는지 모르겠지만, 이 법적 조치가 한국의 공교육이 피폐해지게 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두 번의 헌법소원으로 교육자로서 일종의 사관학교라는 자부심으로 사범대학에 진학했던 우수한 인력들이 더 이상 사범대에 갈 인센티브를 잃었다. 설사 사범대학에 가더라도 일년에 한 번 보는 임용고사라는 수십 대 일의 암기시험을 통과할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기 때문이다. 군대도 사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군대로서의 핵심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킨다. 헌법소원의 판결은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교사 사관학교를 평등 원칙에 위배 된다며 무력화 시킨 것이었다. 이 조치는 평생의 천직으로 교사가 되려던 사람들을 좌절시키고, 교사라는 직업을 사회의 중요한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는 직능 집단으로 인식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천직으로서의 가치와 사명이 아니라 단지 직업의 안정을 추구하는 집단에게는 노동조합을 결성할 필요가 생기는데, 그 결과 생긴 것이 바로 전국교원노조일 것이다.
우리사회에는 언제부턴가 온갖 문제를 법적으로 판단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기관들이 법의 잣대에 의해 원래의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왜곡될 우려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법원도 국가기관이지만 교육계도 그런 점은 마찬가지다. 과연 법원이 국가의 백년대계의 하나인 교육기관의 구도를 법 정의라는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타당했었는지 의문이다.
우리의 공교육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교육 문제는 그 당사자에 따라 너무나 상이한 이해와 해법이 얽혀 있어 교육 정책 당국마저도 때로는 자포자기 상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다소 엉뚱하게 보일지는 모르나 한국 교육에 있어서 법 정의라는 잣대가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육이라는 백년대계의 문제를, 법원이 임용 평등이라는 밥그릇 다툼의 문제로 정의하면서 한국의 공교육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본다.
공교육 문제의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누구는 한국 사회의 지나친 교육열이 문제라고도 하지만, 그 교육열이야말로 6.25 전쟁 후 불모지나 다름 없었던 한국을 세계 10위권 경제로 일으켜 세웠다는 데는 다들 공감하는 바다. 그 교육열이라는 것이 소위 명문대에 가기 위해 수능 점수 올리는 데 집중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로 자주 거론된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거기에 맞추게 되면 그 해법이라는 것은 필경 수능 없이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게 하는, 경쟁 없는 입시정책을 추구하는 방향이 될 터인데, 오늘날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그런 식의 하향 평준화는 이만큼이나마 성장시킨 나라를 퇴보시키자는 말이나 다름 없다. 물론 좀 더 장기적으로 보면 이 문제는 아마도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는 세월을 좀 더 겪은 후에 우리 사회가 대학 졸업장보다 자신만의 특별한 전문성을 갖추는 것이 더 낫다는 인식에 따라 서서히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면 명문 고등학교라고 박수를 보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며 가까운 장래에 바뀔 것 같지도 않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대학 간판 위주의 교육열을 탓해 보았자 대개 그 해법은 탁상공론이나 다름 없게 될 뿐이다.
필자는 현재의 공교육 문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공교육이 학원이라는 사교육에게 경쟁에서 밀리는 현상으로 본다. 공교육이 경쟁력을 잃으니 학생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믿지 못하고 학원을 더 믿으며, 학부모는 비싼 학원비 대느라고 고생이고, 또 학생들은 밤이 깊도록 학교공부와 학원공부로 고생이다. 물론 공교육의 목적이 단지 지식교육이 아니고 전인교육인데 학원과 비교하는 것이 타당하냐는 반론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경험으로는 과거의 공교육은 지식교육에서도 학원에 밀리지 않았고, 인성 교육 측면도 지금보다 나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공교육의 붕괴 현상은 학생들이 교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모습으로도 나타나고, 교사들이 자긍심을 갖고 있지 못한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필자는 어느 고교 수업 현장에서 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강의를 안 듣고 자신의 학원 진도에 맞는 책을 펴 놓고 공부를 하지만 선생님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 30, 40년 전의 고교 수업에서 이런 일은 상상이 안 되는 일일뿐더러, 만약 이런 일 발생했다면 그 학생은 체벌을 포함하여 엄한 징계를 받았을 것이다. 교육이란 거의 훈육(discipline)과 같은 말이다. 그러려면 교육자는 스승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이 있어야 한다. 이 차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오늘의 교사들은 예전에 비해 교사로서의 자부심이나 사명감이 떨어짐에 기인한다고 생각된다. 교사로서의 자존심을 훼손하는 학생의 행동에 대해 사명감이 있는 교사라면 당연히 그런 학생의 태도를 바로 잡아주어야 하고, 그러려면 스스로 학원 수업을 능가하는 교육을 하겠다는 투지를 보여야 할 것인데, 위의 예는 실망스런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가 이런 상태라면 지식교육뿐 아니라 공교육이 주장하는 바 중요한 목적의 하나인 전인교육인들 잘 될 리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서 복잡한 인과관계의 수 많은 논의들이 있겠지만, 필자는 문제의 일단에는 공교육을 책임지는 주체인 교사가 천직의식을 잃었다는 점, 그리고 이렇게 되는데 법조계가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원래 공교육의 주체인 교사의 임용은 국립 사범대학에서 임용고사 없이 교원을 우선 채우고, 부족한 인력을 임용고사에 의해 충원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을 1990년도 어느 땐가 국립 사범대학을 나온 사람들을 우선 채용하는 것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이 제기되어 누구나 평등하게 임용고사를 치르도록 되었다. 또 2004년도에는 사범대학을 나온 사람들에게 임용고사에 가산점을 주는 것이 위헌이라 하여 또 헌법소원이 제기되었고, 역시 위헌 판결로 가산점이 없어졌다.
필자는 사범대학 출신을 옹호할 마음은 없다. 다만 원래 사범대학은 대학 진학 시에 이미 교육자로서 뜻을 세운 사람이 가는 대학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이런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공교육의 가치관을 잘 유지할 수 있었으리라는 아쉬움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법리 상의 평등이 교육의 틀을 굳건히 하는 백년대계보다 중요한 가치를 갖는지 모르겠지만, 이 법적 조치가 한국의 공교육이 피폐해지게 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두 번의 헌법소원으로 교육자로서 일종의 사관학교라는 자부심으로 사범대학에 진학했던 우수한 인력들이 더 이상 사범대에 갈 인센티브를 잃었다. 설사 사범대학에 가더라도 일년에 한 번 보는 임용고사라는 수십 대 일의 암기시험을 통과할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기 때문이다. 군대도 사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군대로서의 핵심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킨다. 헌법소원의 판결은 그런 역할을 해야 할 교사 사관학교를 평등 원칙에 위배 된다며 무력화 시킨 것이었다. 이 조치는 평생의 천직으로 교사가 되려던 사람들을 좌절시키고, 교사라는 직업을 사회의 중요한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안정적인 직장이 보장되는 직능 집단으로 인식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천직으로서의 가치와 사명이 아니라 단지 직업의 안정을 추구하는 집단에게는 노동조합을 결성할 필요가 생기는데, 그 결과 생긴 것이 바로 전국교원노조일 것이다.
우리사회에는 언제부턴가 온갖 문제를 법적으로 판단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주요 기관들이 법의 잣대에 의해 원래의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왜곡될 우려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법원도 국가기관이지만 교육계도 그런 점은 마찬가지다. 과연 법원이 국가의 백년대계의 하나인 교육기관의 구도를 법 정의라는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 타당했었는지 의문이다.
악의 세력에 추종하는 세 유형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2010.06.18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전체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하자 사람들은 나치의 이상론적인 선전인 “나는 미래를 다녀왔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을 되뇌며 줄줄이 스탈린을 배알하였다.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면 터무니 없는 이런 정치 세력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드러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악의 세력에 추종하는 몇 가지 유형을 소개하고 있다.
현대 경영의 비조(鼻祖)로 칭송 받던 피터 드러커는 청년 시절 독일에서 겪었던 일을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 ‘방관자의 모험’에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1933년 당시 23세의 드러커는 쇠퇴하던 비엔나를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임 강사 자리와 신문사 편집인 등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독일은 절대주의 정권 나치가 권력을 잡고 유럽 대륙을 혼돈 속으로 몰아 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드러커는 벌써부터 절대주의 나치 치하에서는 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은 해 왔었지만 다소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결심을 굳히고 즉시 독일을 떠나게 하는 계기는 그 해 초에 겪은 아래의 세 가지 경험이었다.
1) 불의를 못 본체한 어느 경륜 있는 생화학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나치 정치위원이 임명되었을 때 그리고 그 새 지배자의 연설을 듣기 위해 교수뿐 아니라 조교까지 교수회의에 소집됐을 때, 모두들 힘겨루기가 코 앞에 닥쳤음을 알았다. 신임 나치 지도위원은 인사말 같은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유대인의 교내 출입을 금할 것이며, 급여 지불 없이 유대인을 해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군대에서도 듣기 어려운, 더더욱 학문의 전당에서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비난과 독설, 육두문자로 뒤덮인 긴 열변을 토했다. 연설이 끝나고 긴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저명한 원로 생화학자가 뭔가 한 마디 해주길 기다렸다. 마침내 그 훌륭하신 자유주의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아주 흥미로운 연설이었소, 정치위원 동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매우 계몽적이었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면 생리학 연구비가 좀 더 지급될 것인지 알고 싶소이다.” 드러커는 진저리가 쳐졌다. 그리고 48시간 내에 독일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2) 출세욕에 눈 먼 괴물
헨슈는 드러커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게너랄 안차이거’ 지에 근무하던 사람인데, 나치가 정권을 잡자 프랑크푸르트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는 드러커가 사표를 냈다는 말을 듣고 능력 있는 드러커를 붙잡아 두려고 달려 온 것이었다. 드러커가 미국으로 갈 뜻을 분명히 하자 헨슈는 흥분해서 말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난 똑똑한 사람이 아니오. 난 그걸 알죠. 난 권력과 돈을 갖고 싶은 거요. 그래서 4, 5년 전 나치가 처음 시작했을 때 일찌감치 합류한 거요.”, 그 말과 함께 그는 방을 뛰쳐나가 계단을 내려 갔다. 그러나 문을 닫기 전에 그는 다시 한 번 돌아서서 외쳤다. “그리고 잊지 말아요. 당신이 미국에 가게 되면 엘리제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소!” 헨슈는 나치에 합류하면서 유대인인 아내 엘리제와는 이혼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내를 걱정하고 있었다. 헨슈는 후일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로 활동했는데, 얼마나 잔인했던지 그의 부하들에게조차 ‘괴물’이라고 불렸다. 그는 독일이 패전 후 최고 전범으로 수배 받다가 어느 집 지하실에서 연합군에 체포되자 자살했다.
3) 자신만이 나치를 순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진한 양
섀퍼는 독일의 유명 일간지 ‘베를리너 타게블랏’지의 편집장이 되어 달라는 언질을 나치로부터 받고 미국에서 오는 중이었다. 그는 몇 년간 그 신문사의 미국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선거 유세에도 참여하여 그의 사적인 친구가 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드러커는 비엔나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섀퍼의 친구인 선배 몬트겔라스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몬트겔라스는 나치가 서방에 잘 알려진 섀퍼를 단지 이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며 섀퍼의 생각을 돌리길 원했다. 그러나 섀퍼는 자신이 그 제안에 동의하려는 이유는, 조국 독일이 더 이상 나치에 의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섀퍼는 나치의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신문사의 편집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나치로부터 이용 당했다. 섀퍼는 나치가 사실 상 유대인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설, 히틀러가 세계 평화를 열망한다는 사설 등을 쓰거나, 후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만행이 외부에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즉시 외국 대사관을 순회하며 단지 우발적인 작은 사건일 뿐이라고 둘러대는 일을 했다. 그러나 2년 후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그 신문사와 섀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드러커는 악의 세력에 추종하는 세 유형의 이야기를 전하며 이들 중 어느 것이 더 큰 해악인지 자문한다. 그러면서 가장 큰 죄는 첫 사례인 지식인의 무관심을 들었다. 눈먼 출세욕과 자만에 찬 자기 과신은 역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죄악이지만 첫 유형은 현대 사회에 새로이 만연하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다른 두 경우와 달리 첫 번째 유형의 죄악은 사회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수복된 후에도 죄를 추궁할 수 조차 없다.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전체주의 독재체제를 구축하자 사람들은 나치의 이상론적인 선전인 “나는 미래를 다녀왔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모든 것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을 되뇌며 줄줄이 스탈린을 배알하였다.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면 터무니 없는 이런 정치 세력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드러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악의 세력에 추종하는 몇 가지 유형을 소개하고 있다.
현대 경영의 비조(鼻祖)로 칭송 받던 피터 드러커는 청년 시절 독일에서 겪었던 일을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 ‘방관자의 모험’에서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1933년 당시 23세의 드러커는 쇠퇴하던 비엔나를 떠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전임 강사 자리와 신문사 편집인 등의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독일은 절대주의 정권 나치가 권력을 잡고 유럽 대륙을 혼돈 속으로 몰아 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드러커는 벌써부터 절대주의 나치 치하에서는 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은 해 왔었지만 다소 미적거리고 있었는데, 결심을 굳히고 즉시 독일을 떠나게 하는 계기는 그 해 초에 겪은 아래의 세 가지 경험이었다.
1) 불의를 못 본체한 어느 경륜 있는 생화학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나치 정치위원이 임명되었을 때 그리고 그 새 지배자의 연설을 듣기 위해 교수뿐 아니라 조교까지 교수회의에 소집됐을 때, 모두들 힘겨루기가 코 앞에 닥쳤음을 알았다. 신임 나치 지도위원은 인사말 같은 것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유대인의 교내 출입을 금할 것이며, 급여 지불 없이 유대인을 해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군대에서도 듣기 어려운, 더더욱 학문의 전당에서는 전혀 들어 보지 못한 비난과 독설, 육두문자로 뒤덮인 긴 열변을 토했다. 연설이 끝나고 긴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저명한 원로 생화학자가 뭔가 한 마디 해주길 기다렸다. 마침내 그 훌륭하신 자유주의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아주 흥미로운 연설이었소, 정치위원 동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는 매우 계몽적이었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면 생리학 연구비가 좀 더 지급될 것인지 알고 싶소이다.” 드러커는 진저리가 쳐졌다. 그리고 48시간 내에 독일을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2) 출세욕에 눈 먼 괴물
헨슈는 드러커와 함께 ‘프랑크푸르트 게너랄 안차이거’ 지에 근무하던 사람인데, 나치가 정권을 잡자 프랑크푸르트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는 드러커가 사표를 냈다는 말을 듣고 능력 있는 드러커를 붙잡아 두려고 달려 온 것이었다. 드러커가 미국으로 갈 뜻을 분명히 하자 헨슈는 흥분해서 말했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난 똑똑한 사람이 아니오. 난 그걸 알죠. 난 권력과 돈을 갖고 싶은 거요. 그래서 4, 5년 전 나치가 처음 시작했을 때 일찌감치 합류한 거요.”, 그 말과 함께 그는 방을 뛰쳐나가 계단을 내려 갔다. 그러나 문을 닫기 전에 그는 다시 한 번 돌아서서 외쳤다. “그리고 잊지 말아요. 당신이 미국에 가게 되면 엘리제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소!” 헨슈는 나치에 합류하면서 유대인인 아내 엘리제와는 이혼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내를 걱정하고 있었다. 헨슈는 후일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로 활동했는데, 얼마나 잔인했던지 그의 부하들에게조차 ‘괴물’이라고 불렸다. 그는 독일이 패전 후 최고 전범으로 수배 받다가 어느 집 지하실에서 연합군에 체포되자 자살했다.
3) 자신만이 나치를 순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진한 양
섀퍼는 독일의 유명 일간지 ‘베를리너 타게블랏’지의 편집장이 되어 달라는 언질을 나치로부터 받고 미국에서 오는 중이었다. 그는 몇 년간 그 신문사의 미국 특파원으로 일하면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선거 유세에도 참여하여 그의 사적인 친구가 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드러커는 비엔나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섀퍼의 친구인 선배 몬트겔라스와 함께 프랑크푸르트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몬트겔라스는 나치가 서방에 잘 알려진 섀퍼를 단지 이용하려는 것일 수 있다며 섀퍼의 생각을 돌리길 원했다. 그러나 섀퍼는 자신이 그 제안에 동의하려는 이유는, 조국 독일이 더 이상 나치에 의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섀퍼는 나치의 대단한 환영을 받으며 신문사의 편집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나치로부터 이용 당했다. 섀퍼는 나치가 사실 상 유대인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설, 히틀러가 세계 평화를 열망한다는 사설 등을 쓰거나, 후에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만행이 외부에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즉시 외국 대사관을 순회하며 단지 우발적인 작은 사건일 뿐이라고 둘러대는 일을 했다. 그러나 2년 후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그 신문사와 섀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드러커는 악의 세력에 추종하는 세 유형의 이야기를 전하며 이들 중 어느 것이 더 큰 해악인지 자문한다. 그러면서 가장 큰 죄는 첫 사례인 지식인의 무관심을 들었다. 눈먼 출세욕과 자만에 찬 자기 과신은 역사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죄악이지만 첫 유형은 현대 사회에 새로이 만연하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다른 두 경우와 달리 첫 번째 유형의 죄악은 사회가 악의 세력으로부터 수복된 후에도 죄를 추궁할 수 조차 없다.
타당성 없는 한국의 반기업 정서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2010.06.12
한국은 6.25 전쟁 후 불모의 땅에서 단 기간 내에 산업화에 성공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농업으로 먹고 살던 나라가 40 여 년 만에 산업국가가 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예를 찾기 어렵다. 당시 세계 최빈국의 처지에서 단 기간에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인들은 뭔가 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고, 수출산업탑을 받는 기업가들은 한국을 잘 살게 하는 산업의 역군으로서 칭송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지난 세대가 일구어 놓은 산업화의 토대 위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로 글로벌 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업들은 왠지 모르게 국민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저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실상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지탱이 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업들이 만들어 내는 경제적 부에 의한 것이다. 그 외의 기관들, 예컨대 학교, 교회, 공공기관 할 것 없이 여타의 기관은 기업체가 창출하는 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사정이 이럼에도 웬일인지 사회가 기업을 보는 시선은 차갑기만 한데, 이런 분위기를 쉽게 반 기업 정서라고 하는 것 같다. 반 기업 정서는 특히 국민 경제에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중소기업 보다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대기업, 그것도 한국 특유의 재벌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다면 반 기업 정서의 근원은 무엇이며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 추측해 보고자 한다.
반 기업 정서의 시초는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발단되었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을 장착한 초기의 공장에 멀리 촌락 지역에서 살던 수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의 1960년대 상황과 비슷하다. 도시든 공장이든 갑자기 늘어난 인구를 수용하는 데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으므로 초기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들의 생활여건은 열악했다. 이런 분위기를 자본가의 착취로 규정하며 칼 마르크스는 “세계의 노동자는 연합하라.”며 선동하였다. 그런데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굶주리고 아무 희망이 없던 촌락보다는 그래도 도시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을 스스로 바랐던 것이다. 노동자에게 즉시 만족할만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산업화 초기 생산성이 낮은 탓이었지 자본가들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마르크스가 책상물림이 아니고 실제로 산업현장에서 일을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었다면 자본론 같은 주장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노동자에 대한 만족할만한 보수가 주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였는데, 이는 미국에서 프레더릭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법을 창안하여 보급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과학적 관리법은 즉시 세계에 퍼졌고, 점차 노동자들은 돈 모아 자동차를 한 대쯤은 살 수 있는 중산층이 되어 갔다. 아마도 세계가 마르크스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지켜내며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공헌은 테일러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둘째는 갑자기 사회의 주역으로 떠 오른 대기업 법인에 대한 질투심을 들 수 있다. 역사 이래 왕에게 귀속되어 있던 권력이 시민혁명 이후 공화정의 주요 기관들인 정부, 의회 등에 분산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기업 법인이 등장하여 수 많은 종업원을 고용한 자율적인 세력이 되어 버렸다. 기업체의 경영은 너무나 전문적이라 정부 권력이 실속 있는 참견을 할 수도 없고, 규제 등으로 참견을 해 봤자 대부분 기업체의 존재 목적인 경제적 부의 창출을 방해하는 일뿐이었다. 아마도 이들 대기업 법인의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의 권력은 사실 중세 시대의 봉건 영주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국가 권력은 온갖 규제로 기업체를 구속하려 했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사실은 이런 막강한 권력이 대기업 법인의 경영자가 원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영자의 권력은 기업체 경영의 전문 영역에는 관심이 없고 증권에 투자해서 돈을 불리는 데만 관심 있는 일반 투자자들이 등을 떠 밀어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자연스런 결과였다. 결국 대기업 법인의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본분인 기업경영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한 그들을 비난할 근거는 전혀 없다.
셋째는 이익에 대한 반감을 반 기업 정서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기업이 창출하는 이익이 실은 국가경제를 지탱하게 하는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이익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하지만 만약 성인이 경영을 맡았다고 해도 이익을 내지 못하면 그 기업은 오래잖아 망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익은 기업 경영의 본질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너무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인가? 큰 이익도 사실은 다른 경영자에 비해서 기업을 성장시킨 능력을 칭찬할 일이지 비난할 일은 아니다. 또한 회계 보고서에 나온 이익이라는 것이 매우 추상적인 수치인 점을 생각해야 한다. 드러커는 회계 상의 이익은 기업이 장래에도 생존하기 위해 투자해야 할 미래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는 오히려 비용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했다. 사실 이익이라는 추상적 수치는 미래를 위한 생존 비용을 제하고 나면 적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이 좀 났다고 떠 벌이며 경영진과 종업원 할 것 없이 온갖 명목을 붙여 보너스로 뜯어 가는 것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것과 같이 무책임한 행태라고 볼 수 있다.
넷째는 기업체가 정직하게 처신을 하지 못함으로써 비난 받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무슨 비자금 사건 같은 것이 이런 예에 속한다. 하지만 기업 경영의 표준은 점차 선진화 되어 가고 있고, 사실상 현재의 수준으로 보더라도 기업체가 다른 사회적 기관들에 비해 특별히 부정직한 편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전문직에 종사하는 개인과 대기업체의 세무 관행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정직하게 세금을 신고하는지 생각해 보면 분명 공인 회계사의 감사를 받는 후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약간의 근거가 있어 보이는 반기업 정서의 원인은 그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일반 근로자에 비해서 너무 큰 보수를 가져가는 점일 것이다. 미국의 대기업 경영자는 종업원 평균 급여의 수백 배에 달하는 보수를 받고, 기업 경영에 실패해서 구제 금융을 논해야 하는 자리에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가는 지각 없는 행동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들의 끝 모르는 욕심이 세계 경제공황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단기 성과를 바탕으로 경영진의 보수를 주는 미국의 경영은 마치 기업 경영을 도박판과 같이 저급한 게임으로 보이게 한다. 반면에 몇 년 전 회사의 부도로 거리에 나 앉게 된 종업원을 취업시켜 달라고 TV 에 나와 눈물로 호소하던 일본 경영자의 모습에서 일본의 경영은 경영을 단지 경제적 성과를 내는 기관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 이루어진 기관임을 깨닫게 한다. 한국의 기업 관행은 일본보다는 미국식에 가깝다. 바라건대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서 한국의 전문경영인들은 스스로 삼가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불필요하게 사회의 시기심을 유발하지 않았으면 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다원적 사회의 주역으로 떠 오른 기업체를 비난하는 정서라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실리적으로도 그리 타당하지 않고, 대부분 감정적인 성격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실리적으로 보더라도 오늘날의 고용 문제, 비정규직 문제, 국가 경제의 성장을 통한 복지 증진 등 산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동력은 오직 기업가 정신에 충만한 기업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서 나온다. 그 밖의 온갖 해결책이라고 하는 공공근로 사업이니 일하는 시간 나누기 같은 것들은 그야말로 미봉책일 뿐이다. 국가를 안보적으로 지켜주는 군인의 애국심을 북돋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경제적으로 지탱하고 성장시키는 주역인 대기업 법인에 대해 사회적으로 칭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지도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다급하면 대통령까지 나서서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투자처를 외국에서 찾지 말고 국내에다 투자하라고 하는 것은 인정머리 없는 일이다. 차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을 기업하기 제일 좋은 나라, 예컨대 한국에서의 기업은 계속성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상속세도 면제해주는 등 규제와 제도 면에서 과감한 인센티브를 주었으면 한다.
한국은 6.25 전쟁 후 불모의 땅에서 단 기간 내에 산업화에 성공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농업으로 먹고 살던 나라가 40 여 년 만에 산업국가가 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그 예를 찾기 어렵다. 당시 세계 최빈국의 처지에서 단 기간에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인들은 뭔가 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고, 수출산업탑을 받는 기업가들은 한국을 잘 살게 하는 산업의 역군으로서 칭송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지난 세대가 일구어 놓은 산업화의 토대 위에서 ‘메이드 인 코리아’로 글로벌 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기업들은 왠지 모르게 국민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저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실상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지탱이 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업들이 만들어 내는 경제적 부에 의한 것이다. 그 외의 기관들, 예컨대 학교, 교회, 공공기관 할 것 없이 여타의 기관은 기업체가 창출하는 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사정이 이럼에도 웬일인지 사회가 기업을 보는 시선은 차갑기만 한데, 이런 분위기를 쉽게 반 기업 정서라고 하는 것 같다. 반 기업 정서는 특히 국민 경제에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하는 중소기업 보다는 막대한 영향력을 갖는 대기업, 그것도 한국 특유의 재벌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그렇다면 반 기업 정서의 근원은 무엇이며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 추측해 보고자 한다.
반 기업 정서의 시초는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발단되었을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증기기관을 장착한 초기의 공장에 멀리 촌락 지역에서 살던 수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의 1960년대 상황과 비슷하다. 도시든 공장이든 갑자기 늘어난 인구를 수용하는 데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으므로 초기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들의 생활여건은 열악했다. 이런 분위기를 자본가의 착취로 규정하며 칼 마르크스는 “세계의 노동자는 연합하라.”며 선동하였다. 그런데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굶주리고 아무 희망이 없던 촌락보다는 그래도 도시에 나가 일을 하는 것을 스스로 바랐던 것이다. 노동자에게 즉시 만족할만한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산업화 초기 생산성이 낮은 탓이었지 자본가들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약 마르크스가 책상물림이 아니고 실제로 산업현장에서 일을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었다면 자본론 같은 주장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노동자에 대한 만족할만한 보수가 주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였는데, 이는 미국에서 프레더릭 테일러가 과학적 관리법을 창안하여 보급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과학적 관리법은 즉시 세계에 퍼졌고, 점차 노동자들은 돈 모아 자동차를 한 대쯤은 살 수 있는 중산층이 되어 갔다. 아마도 세계가 마르크스의 선동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지켜내며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공헌은 테일러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둘째는 갑자기 사회의 주역으로 떠 오른 대기업 법인에 대한 질투심을 들 수 있다. 역사 이래 왕에게 귀속되어 있던 권력이 시민혁명 이후 공화정의 주요 기관들인 정부, 의회 등에 분산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기업 법인이 등장하여 수 많은 종업원을 고용한 자율적인 세력이 되어 버렸다. 기업체의 경영은 너무나 전문적이라 정부 권력이 실속 있는 참견을 할 수도 없고, 규제 등으로 참견을 해 봤자 대부분 기업체의 존재 목적인 경제적 부의 창출을 방해하는 일뿐이었다. 아마도 이들 대기업 법인의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의 권력은 사실 중세 시대의 봉건 영주에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국가 권력은 온갖 규제로 기업체를 구속하려 했다. 그런데 유의해야 할 사실은 이런 막강한 권력이 대기업 법인의 경영자가 원해서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경영자의 권력은 기업체 경영의 전문 영역에는 관심이 없고 증권에 투자해서 돈을 불리는 데만 관심 있는 일반 투자자들이 등을 떠 밀어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자연스런 결과였다. 결국 대기업 법인의 최고경영자가 자신의 본분인 기업경영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한 그들을 비난할 근거는 전혀 없다.
셋째는 이익에 대한 반감을 반 기업 정서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기업이 창출하는 이익이 실은 국가경제를 지탱하게 하는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이익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하지만 만약 성인이 경영을 맡았다고 해도 이익을 내지 못하면 그 기업은 오래잖아 망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이익은 기업 경영의 본질이다. 그러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너무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인가? 큰 이익도 사실은 다른 경영자에 비해서 기업을 성장시킨 능력을 칭찬할 일이지 비난할 일은 아니다. 또한 회계 보고서에 나온 이익이라는 것이 매우 추상적인 수치인 점을 생각해야 한다. 드러커는 회계 상의 이익은 기업이 장래에도 생존하기 위해 투자해야 할 미래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는 오히려 비용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고 했다. 사실 이익이라는 추상적 수치는 미래를 위한 생존 비용을 제하고 나면 적자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익이 좀 났다고 떠 벌이며 경영진과 종업원 할 것 없이 온갖 명목을 붙여 보너스로 뜯어 가는 것은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것과 같이 무책임한 행태라고 볼 수 있다.
넷째는 기업체가 정직하게 처신을 하지 못함으로써 비난 받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무슨 비자금 사건 같은 것이 이런 예에 속한다. 하지만 기업 경영의 표준은 점차 선진화 되어 가고 있고, 사실상 현재의 수준으로 보더라도 기업체가 다른 사회적 기관들에 비해 특별히 부정직한 편은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전문직에 종사하는 개인과 대기업체의 세무 관행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정직하게 세금을 신고하는지 생각해 보면 분명 공인 회계사의 감사를 받는 후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약간의 근거가 있어 보이는 반기업 정서의 원인은 그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일반 근로자에 비해서 너무 큰 보수를 가져가는 점일 것이다. 미국의 대기업 경영자는 종업원 평균 급여의 수백 배에 달하는 보수를 받고, 기업 경영에 실패해서 구제 금융을 논해야 하는 자리에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가는 지각 없는 행동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이들의 끝 모르는 욕심이 세계 경제공황의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단기 성과를 바탕으로 경영진의 보수를 주는 미국의 경영은 마치 기업 경영을 도박판과 같이 저급한 게임으로 보이게 한다. 반면에 몇 년 전 회사의 부도로 거리에 나 앉게 된 종업원을 취업시켜 달라고 TV 에 나와 눈물로 호소하던 일본 경영자의 모습에서 일본의 경영은 경영을 단지 경제적 성과를 내는 기관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 이루어진 기관임을 깨닫게 한다. 한국의 기업 관행은 일본보다는 미국식에 가깝다. 바라건대 우리 사회의 주역으로서 한국의 전문경영인들은 스스로 삼가고 양보하는 마음으로, 불필요하게 사회의 시기심을 유발하지 않았으면 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다원적 사회의 주역으로 떠 오른 기업체를 비난하는 정서라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실리적으로도 그리 타당하지 않고, 대부분 감정적인 성격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실리적으로 보더라도 오늘날의 고용 문제, 비정규직 문제, 국가 경제의 성장을 통한 복지 증진 등 산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동력은 오직 기업가 정신에 충만한 기업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서 나온다. 그 밖의 온갖 해결책이라고 하는 공공근로 사업이니 일하는 시간 나누기 같은 것들은 그야말로 미봉책일 뿐이다. 국가를 안보적으로 지켜주는 군인의 애국심을 북돋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가를 경제적으로 지탱하고 성장시키는 주역인 대기업 법인에 대해 사회적으로 칭찬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지도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다급하면 대통령까지 나서서 기업가들에게 새로운 투자처를 외국에서 찾지 말고 국내에다 투자하라고 하는 것은 인정머리 없는 일이다. 차제에 한 걸음 더 나아가 한국을 기업하기 제일 좋은 나라, 예컨대 한국에서의 기업은 계속성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 상속세도 면제해주는 등 규제와 제도 면에서 과감한 인센티브를 주었으면 한다.
천안함 사건과 과학적 사고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2010.06.07
천안함 사건이 난지 이제 두 달이 지났다.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전 국민의 관심이 이 사건에 쏠렸던 것 같은데 6.2 지방 선거 후 이제 천안함은 잊혀지고 있는 것 같다. 늘 그래왔듯이 우리는 국가적으로 큰 사건이 나면 온통 너나 할 것 없이 그 일에 관심을 쏟다가도 어느덧 다른 이슈가 생기면 앞의 일은 완전히 잊어 버린다.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미국은 아직도 2008년 경제공황의 원인이 됐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원인과 대책을 위한 국회 위원회를 가동 중이며, 바로 오늘도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 ‘트리플 A’ 급 신용평가를 함으로써 위험을 경고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던 무디스의 회장 등을 청문회에 불러 심문하고 있다.
장병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천안함 사건이 전화위복이 되어 더 튼튼한 안보 태세를 갖출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스스로 반성할 부분을 한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하나의 사안을 놓고 어떻게 그리도 상반된 주장들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다. 사실 바람직하게는 그 사안의 책임을 지고 있는 기관이 조사하여 결론을 발표하고, 그 후 또 관련되는 기관들이 대책을 논의하여 실천하면 되는 것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과학적 사고의 부재, 즉 불합리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합리성이 결여된 사회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비능률적인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합리성이 결여된 사회는 누가 거짓 주장을 할지라도 그 잘못을 추궁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감각이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우리 사회가 합리성, 과학성에 있어서 어떤 수준일까 먼저 생각해 본다. 어떤 사고를 다루는 우리나라 언론의 뉴스를 보면 과학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뉴스에서 “경찰은 ‘정확한’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라는 식의 표현을 자주 접한다. 하지만 사건 현장을 녹화도 하지 않고, 또한 신도 아닌 주제에 어떻게 ‘정확한 사고의 원인’을 자신할 수 있는가? 신만이 할 수 잇는 일을 마치 늘 할 수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 기자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경찰은 다만 충실히 증거를 수집해서 가설적으로 세운 원인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 그 증거와 실험 방법이 충실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유사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때 그 조사는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내린 결론도 낮은 가능성이긴 하지만 틀릴 수는 있다. 따라서 사건 조사에 대한 언론 보도는 “경찰은 사고의 원인으로서 00 가능성을 놓고 상세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정도가 되어야 한다.
즉 과학적 사고란 첫째, 정확성 자체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정확성 이전에 경험적 방법론, 즉 증거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론을 내리겠다는 실증적 방법론을 요구한다. 이번 천안함 사건은 국가 안보의 중대성에 비추어 신중한 조사와 다국적 전문가 집단이 참여한 조사에 의해 결론이 내려졌다. 한마디로 몇 가지 사고 원인에 대한 가설을 설정했고 이어서 다각적인 증거 수집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결론을 도출하는 실증적 방법(empirical method)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조사 과정에서 결정적 증거를 못 찾았다면 심증은 가지만 증명할 수 없었다라는 결론이 내려졌을 것이다.
둘째로,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게 하는 것은 그 주장이 관찰 가능한 증거에 의해서 확실히 반증될 수 있는 주장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것 저것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주장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념이다. 그 이념을 위해 필요한 설명을 이리 저리 꿰어 맞추게 되니 합리성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사건의 과정에서 이념적 편향 때문인지 그 결과에 지속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주장들이 있었다. 물론 국가적인 중대 사안에 다양한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주장이 합리성을 가지려면 역시 앞서 살펴본 대로 실험적 증거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주장이라야 한다. 이것을 뒤집어 얘기하자면 관련된 증거에 의해서 주장이 기각되면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가 바로 과학적인 자세라는 말이다.
불합리한 주장을 주특기로 삼는 사람들의 논법에는 십중팔구 점쟁이의 점괘와 같은 모호성이 숨어 있다. 딱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아니면 저것 식으로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다. 이번 천안함 사건에도 처음 사건이 났을 때 이들은 미군 전함과의 충돌설 등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 후 여러 증거 상 북한의 행위임이 드러났지만 이들은 결코 자신들의 주장에 잘못이 있었다고 시인하는 일도, 또한 사건을 일으킨 북한을 질타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안보에 구멍이 뚫린 점을 지적하며 군을 문책하고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에 대해서도 전쟁설을 제기하며 초점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은 우리 정부를 부정하고 북한을 편드는 더 큰 이념을 위해 그것에 도움이 되는 주장들을 하나씩 제기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현대 과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아인시타인의 이론은 결코 양다리를 걸치는 일이 없다. 예를 들어 아인시타인의 중력 이론에 의하면 태양과 같은 무거운 물체의 주위를 통과해 온 빛은 그 중력에 의해 휘게 된다. 따라서 태양의 주위에 보이는 별자리는 태양과 멀리 떨어졌을 때의 같은 별자리에 비해 빛의 휨에 의해 다른 모양을 나타내게 된다. 하지만 이 실험이 어려운 점은 태양이 너무나 밝아서 낮에는 그 주위의 별들을 사진 찍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아인시타인의 중력 이론은 ‘에딩턴(Eddington)의 원정(1919)’에 의해 검증되었는데, 그는 개기일식 때 태양 주위의 별자리 사진을 찍고, 이를 밤에 찍은 같은 별자리 사진과 비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실험에서 예측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인시타인의 중력 이론은 간단히 폐기되는 운명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과학의 속성이다.
이렇게 과학적, 합리적 사고란, 객관적인 관찰, 실험, 증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주장을 하며, 그 주장에 성실성이 있어서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양다리가 아니어야 하며, 또한 다른 반증이 나오기 전까지는 합리적인 결론이라면 군소리 없이 믿어 주는 사고방식이다.
앞에 언급한 미국 무디스의 회장이 청문회에서 밝혀야 했던 것은 자신의 회사가 갖고 있는 정보와 평가 도구를 가지고 전문가의 윤리를 지켜 최선의 의사결정을 했는데도 ‘트리플 A’ 라는 평가가 나왔는지, 아니면 무슨 목적에 의해 전문가의 윤리가 지켜지지 않은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도 국가적인 중대 사안에 이리 저리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은 끝까지 청문회에 세워서라도 그 불합리와 비윤리성을 교정시켰으면 한다.
천안함 사건이 난지 이제 두 달이 지났다.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전 국민의 관심이 이 사건에 쏠렸던 것 같은데 6.2 지방 선거 후 이제 천안함은 잊혀지고 있는 것 같다. 늘 그래왔듯이 우리는 국가적으로 큰 사건이 나면 온통 너나 할 것 없이 그 일에 관심을 쏟다가도 어느덧 다른 이슈가 생기면 앞의 일은 완전히 잊어 버린다.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미국은 아직도 2008년 경제공황의 원인이 됐던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원인과 대책을 위한 국회 위원회를 가동 중이며, 바로 오늘도 서브 프라임 모기지에 ‘트리플 A’ 급 신용평가를 함으로써 위험을 경고하는 데 완전히 실패했던 무디스의 회장 등을 청문회에 불러 심문하고 있다.
장병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천안함 사건이 전화위복이 되어 더 튼튼한 안보 태세를 갖출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 스스로 반성할 부분을 한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이 사건은 하나의 사안을 놓고 어떻게 그리도 상반된 주장들이 나올 수 있을까 생각하게 만든 사건이다. 사실 바람직하게는 그 사안의 책임을 지고 있는 기관이 조사하여 결론을 발표하고, 그 후 또 관련되는 기관들이 대책을 논의하여 실천하면 되는 것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과학적 사고의 부재, 즉 불합리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합리성이 결여된 사회는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는 비능률적인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합리성이 결여된 사회는 누가 거짓 주장을 할지라도 그 잘못을 추궁하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감각이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우리 사회가 합리성, 과학성에 있어서 어떤 수준일까 먼저 생각해 본다. 어떤 사고를 다루는 우리나라 언론의 뉴스를 보면 과학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있다. 우리는 뉴스에서 “경찰은 ‘정확한’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고 있습니다.”라는 식의 표현을 자주 접한다. 하지만 사건 현장을 녹화도 하지 않고, 또한 신도 아닌 주제에 어떻게 ‘정확한 사고의 원인’을 자신할 수 있는가? 신만이 할 수 잇는 일을 마치 늘 할 수 있는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 기자들이 참 대단해 보인다. 경찰은 다만 충실히 증거를 수집해서 가설적으로 세운 원인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 그 증거와 실험 방법이 충실해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유사한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때 그 조사는 합리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내린 결론도 낮은 가능성이긴 하지만 틀릴 수는 있다. 따라서 사건 조사에 대한 언론 보도는 “경찰은 사고의 원인으로서 00 가능성을 놓고 상세한 분석을 하고 있습니다.” 정도가 되어야 한다.
즉 과학적 사고란 첫째, 정확성 자체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정확성 이전에 경험적 방법론, 즉 증거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론을 내리겠다는 실증적 방법론을 요구한다. 이번 천안함 사건은 국가 안보의 중대성에 비추어 신중한 조사와 다국적 전문가 집단이 참여한 조사에 의해 결론이 내려졌다. 한마디로 몇 가지 사고 원인에 대한 가설을 설정했고 이어서 다각적인 증거 수집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결론을 도출하는 실증적 방법(empirical method)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조사 과정에서 결정적 증거를 못 찾았다면 심증은 가지만 증명할 수 없었다라는 결론이 내려졌을 것이다.
둘째로, 과학과 비과학을 구별하게 하는 것은 그 주장이 관찰 가능한 증거에 의해서 확실히 반증될 수 있는 주장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것 저것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주장은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이념이다. 그 이념을 위해 필요한 설명을 이리 저리 꿰어 맞추게 되니 합리성과는 애초에 거리가 멀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사건의 과정에서 이념적 편향 때문인지 그 결과에 지속적으로 반론을 제기하는 주장들이 있었다. 물론 국가적인 중대 사안에 다양한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 주장이 합리성을 가지려면 역시 앞서 살펴본 대로 실험적 증거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주장이라야 한다. 이것을 뒤집어 얘기하자면 관련된 증거에 의해서 주장이 기각되면 깨끗이 승복하는 자세가 바로 과학적인 자세라는 말이다.
불합리한 주장을 주특기로 삼는 사람들의 논법에는 십중팔구 점쟁이의 점괘와 같은 모호성이 숨어 있다. 딱 이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 아니면 저것 식으로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다. 이번 천안함 사건에도 처음 사건이 났을 때 이들은 미군 전함과의 충돌설 등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 후 여러 증거 상 북한의 행위임이 드러났지만 이들은 결코 자신들의 주장에 잘못이 있었다고 시인하는 일도, 또한 사건을 일으킨 북한을 질타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이번에는 안보에 구멍이 뚫린 점을 지적하며 군을 문책하고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천안함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에 대해서도 전쟁설을 제기하며 초점을 돌렸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주장은 우리 정부를 부정하고 북한을 편드는 더 큰 이념을 위해 그것에 도움이 되는 주장들을 하나씩 제기하는 것이라는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현대 과학의 진수라 할 수 있는 아인시타인의 이론은 결코 양다리를 걸치는 일이 없다. 예를 들어 아인시타인의 중력 이론에 의하면 태양과 같은 무거운 물체의 주위를 통과해 온 빛은 그 중력에 의해 휘게 된다. 따라서 태양의 주위에 보이는 별자리는 태양과 멀리 떨어졌을 때의 같은 별자리에 비해 빛의 휨에 의해 다른 모양을 나타내게 된다. 하지만 이 실험이 어려운 점은 태양이 너무나 밝아서 낮에는 그 주위의 별들을 사진 찍을 수 없다는 데 있다. 아인시타인의 중력 이론은 ‘에딩턴(Eddington)의 원정(1919)’에 의해 검증되었는데, 그는 개기일식 때 태양 주위의 별자리 사진을 찍고, 이를 밤에 찍은 같은 별자리 사진과 비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 실험에서 예측된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인시타인의 중력 이론은 간단히 폐기되는 운명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과학의 속성이다.
이렇게 과학적, 합리적 사고란, 객관적인 관찰, 실험, 증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주장을 하며, 그 주장에 성실성이 있어서 이것 아니면 저것 식의 양다리가 아니어야 하며, 또한 다른 반증이 나오기 전까지는 합리적인 결론이라면 군소리 없이 믿어 주는 사고방식이다.
앞에 언급한 미국 무디스의 회장이 청문회에서 밝혀야 했던 것은 자신의 회사가 갖고 있는 정보와 평가 도구를 가지고 전문가의 윤리를 지켜 최선의 의사결정을 했는데도 ‘트리플 A’ 라는 평가가 나왔는지, 아니면 무슨 목적에 의해 전문가의 윤리가 지켜지지 않은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도 국가적인 중대 사안에 이리 저리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은 끝까지 청문회에 세워서라도 그 불합리와 비윤리성을 교정시켰으면 한다.
피터 드러커와 칼 폴라니
문근찬 한국사이버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 뉴데일리, 2010.06.05
보수와 진보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형이라 할만한 인물을 탐구해 보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현대 산업사회가 본격화 하던 시기 이후의 경제 체제에 대해 연구한 대표적인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들자면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2005)와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를 꼽을 수 있다.
1927년 크리스마스 날, 독일에서 대학에 다니던 시절 드러커는 방학에 비엔나의 집에 왔다가 ‘오스트리안 에코노미스트’ 잡지의 편집 회의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잡지사에서 그런 초청장이 온 것은 그 잡지를 후원했던 드러커의 부친에 대한 감사의 뜻이었는지, 혹은 드러커가 대학 입학 논문으로 쓴 ‘파나마 운하와 국제 무역에 대한 영향’이라는 글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여튼 이 자리에서 드러커는 칼 폴라니와 처음 만났고, 그 후 평생의 인연을 맺으며 살았다.
사회 현상에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서로 상대방의 천재성을 알아 봤던것 같다. 두 사람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생각으로 드러커는 폴라니의 집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그곳은 비엔나 변두리의 허름한 동네였는데, 전차를 두어 번 갈아 타고, 또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연립주택의 5층 꼭대기였다. 드러커는 그 집에서의 크리스마스 만찬 모습을 자신의 자전적 책 ‘방관자의 모험’에 상세히 그리고 있다.
『우리는 도착하자 즉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앉았는데, 식사라고는 껍질을 엉성하게 벗기고 반쯤 익힌 감자밖에 없는, 그야말로 내 생애 최악의 것이었다. 이게 크리스마스 만찬이라니! 그런데 폴라니의 가족들(홀로 된 어머니, 아내, 그리고 여덟 살 난 딸)은 손님인 나와 음식에는 관심도 안 주고, 다음 달의 생활비를 벌 수 있을지에 대해 격렬히 토의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돈의 액수란 것이 너무나 적어서 폴라니가 잡지사의 부편집장으로서 받는 액수의 극히 일부분이면 될 정도였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폴라니 박사님의 월급이라면 분명 한 집안이 충분히 잘 살 수 있지 않으신가요?”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폴라니 가족은 일제히 대답했다. “자기의 급여를 자기 자신에게 쓰다니, 거 참 훌륭한 생각이군요?” 그들은 비엔나에 넘쳐 나는 헝가리의 전쟁 피난민들을 위해 월급 전액을 쓰고, 자신들이 먹고 사는 비용은 별도로 벌어서 쓰는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
드러커와 폴라니와의 교류는 그 후 드러커의 런던 거주 시절을 거쳐 미국에서까지 평생 동안 이어졌다. 드러커는 1941년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 분야의 학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칼 폴라니를 전임교수가 되도록 소개했고, 그 자신도 1942년 여름 정부 육군성의 일을 마치고 베닝턴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던 것이다. 버몬트에서 지내던 1940년 무렵은 드러커가 ‘산업인의 미래(The Future of Industrial Man)’의 초고를 쓰면서 칼 폴라니와 자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지냈던 시절이었다. 드러커가 2년 후 ‘산업인의 미래’에서 대기업 법인 조직이 경제적 조직인 것만큼이나 사회적 조직이고 공동체 사회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새로운 산업사회에서 기업체야말로 중추적인 기관이며 따라서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기관인지를 간파했던 것이다. 그 시절 폴라니는 경제와 사회의 이론적 통합 모델로서, 경제와 공동체를 조화시키면서 경제적 성장과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구상한 ‘위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을 썼다. 그는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등 기존의 체제를 뛰어 넘어, 19세기적 가치의 대안으로서 공동체와 그 안의 인간관계는 분열을 조장하는 시장의 힘으로부터 보호되는 독특한 방식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가 경제사와 문화인류학을 통해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시도할수록 그는 점점 더 수수께끼 같은 고대와 선사시대, 원시경제 속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드러커는 폴라니와의 교류를 통하여 절대적인 하나의 완전한 좋은 사회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산업인의 미래’를 통해서 ‘완전한 사회 대신 적당히 견딜만한, 그러나 자유로운 사회’를 받아들이는 관점, 즉 보수주의적 관점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사회란 폴라니의 이상주의적인 사회와는 달리 시장의 혼란과 불화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개인의 자유를 지키게 되는, 갈등과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과 불일치라는 대가를 치를 것이고, 커다란 선(善)에는 관심을 덜 갖는 대신, 적은 악(惡)에는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사회로 묘사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혹은 원시 공통체 사회로 복귀해야만 가능한 이상향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칼 폴라니와 같이 자신의 급여를 온통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들만으로 이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런 공동체적 이상향은 오늘날의 거대한 경제 체제에서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드러커는 그 점을 깨닫고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기능하는 사회’를 정의하였다. 이는 큰 틀의 시장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기업과 개인들, 그러나 각각의 커뮤니티는 인간적인 공동체를 추구하는 조화를 모색한다. 반면에 폴라니의 이상주의는 사회 전체를 원시 부족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구현되려면 개인의 자유보다는 전체 공동체를 주관하는 절대 권력이 필요할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 지상주의로 치닫는 것을 잠시나마 되돌아 보도록 하는 데는 폴라니와 같은 몽상가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마치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 양 사람들이 현혹된다면 이는 몽상가들이 주는 폐해가 될 것이다.
보수와 진보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전형이라 할만한 인물을 탐구해 보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현대 산업사회가 본격화 하던 시기 이후의 경제 체제에 대해 연구한 대표적인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들자면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 1909-2005)와 칼 폴라니(Karl Polanyi, 1886-1964)를 꼽을 수 있다.
1927년 크리스마스 날, 독일에서 대학에 다니던 시절 드러커는 방학에 비엔나의 집에 왔다가 ‘오스트리안 에코노미스트’ 잡지의 편집 회의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잡지사에서 그런 초청장이 온 것은 그 잡지를 후원했던 드러커의 부친에 대한 감사의 뜻이었는지, 혹은 드러커가 대학 입학 논문으로 쓴 ‘파나마 운하와 국제 무역에 대한 영향’이라는 글 때문이었는지는 모른다. 하여튼 이 자리에서 드러커는 칼 폴라니와 처음 만났고, 그 후 평생의 인연을 맺으며 살았다.
사회 현상에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던 두 사람은 첫 만남에서 서로 상대방의 천재성을 알아 봤던것 같다. 두 사람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생각으로 드러커는 폴라니의 집으로 함께 가게 되었다. 그곳은 비엔나 변두리의 허름한 동네였는데, 전차를 두어 번 갈아 타고, 또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연립주택의 5층 꼭대기였다. 드러커는 그 집에서의 크리스마스 만찬 모습을 자신의 자전적 책 ‘방관자의 모험’에 상세히 그리고 있다.
『우리는 도착하자 즉시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앉았는데, 식사라고는 껍질을 엉성하게 벗기고 반쯤 익힌 감자밖에 없는, 그야말로 내 생애 최악의 것이었다. 이게 크리스마스 만찬이라니! 그런데 폴라니의 가족들(홀로 된 어머니, 아내, 그리고 여덟 살 난 딸)은 손님인 나와 음식에는 관심도 안 주고, 다음 달의 생활비를 벌 수 있을지에 대해 격렬히 토의했다. 하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돈의 액수란 것이 너무나 적어서 폴라니가 잡지사의 부편집장으로서 받는 액수의 극히 일부분이면 될 정도였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폴라니 박사님의 월급이라면 분명 한 집안이 충분히 잘 살 수 있지 않으신가요?”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폴라니 가족은 일제히 대답했다. “자기의 급여를 자기 자신에게 쓰다니, 거 참 훌륭한 생각이군요?” 그들은 비엔나에 넘쳐 나는 헝가리의 전쟁 피난민들을 위해 월급 전액을 쓰고, 자신들이 먹고 사는 비용은 별도로 벌어서 쓰는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
드러커와 폴라니와의 교류는 그 후 드러커의 런던 거주 시절을 거쳐 미국에서까지 평생 동안 이어졌다. 드러커는 1941년 버몬트의 베닝턴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 분야의 학자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칼 폴라니를 전임교수가 되도록 소개했고, 그 자신도 1942년 여름 정부 육군성의 일을 마치고 베닝턴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던 것이다. 버몬트에서 지내던 1940년 무렵은 드러커가 ‘산업인의 미래(The Future of Industrial Man)’의 초고를 쓰면서 칼 폴라니와 자주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지냈던 시절이었다. 드러커가 2년 후 ‘산업인의 미래’에서 대기업 법인 조직이 경제적 조직인 것만큼이나 사회적 조직이고 공동체 사회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새로운 산업사회에서 기업체야말로 중추적인 기관이며 따라서 막중한 책임을 가지고 있는 기관인지를 간파했던 것이다. 그 시절 폴라니는 경제와 사회의 이론적 통합 모델로서, 경제와 공동체를 조화시키면서 경제적 성장과 개인적 자유를 허용하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구상한 ‘위대한 전환(The Great Transformation)’을 썼다. 그는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주의 등 기존의 체제를 뛰어 넘어, 19세기적 가치의 대안으로서 공동체와 그 안의 인간관계는 분열을 조장하는 시장의 힘으로부터 보호되는 독특한 방식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가 경제사와 문화인류학을 통해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시도할수록 그는 점점 더 수수께끼 같은 고대와 선사시대, 원시경제 속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드러커는 폴라니와의 교류를 통하여 절대적인 하나의 완전한 좋은 사회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산업인의 미래’를 통해서 ‘완전한 사회 대신 적당히 견딜만한, 그러나 자유로운 사회’를 받아들이는 관점, 즉 보수주의적 관점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런 사회란 폴라니의 이상주의적인 사회와는 달리 시장의 혼란과 불화라는 대가를 치르면서 개인의 자유를 지키게 되는, 갈등과 위험을 감수하는 선택과 불일치라는 대가를 치를 것이고, 커다란 선(善)에는 관심을 덜 갖는 대신, 적은 악(惡)에는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는 사회로 묘사할 수 있다.
우리 주위에는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혹은 원시 공통체 사회로 복귀해야만 가능한 이상향을 꿈꾸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칼 폴라니와 같이 자신의 급여를 온통 어려운 사람을 위해 쓸 수 있는 정신의 소유자들만으로 이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모를까 그런 공동체적 이상향은 오늘날의 거대한 경제 체제에서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드러커는 그 점을 깨닫고 보수주의적 관점에서 ‘기능하는 사회’를 정의하였다. 이는 큰 틀의 시장 자본주의의 틀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기업과 개인들, 그러나 각각의 커뮤니티는 인간적인 공동체를 추구하는 조화를 모색한다. 반면에 폴라니의 이상주의는 사회 전체를 원시 부족사회에서나 볼 수 있는 공동체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구현되려면 개인의 자유보다는 전체 공동체를 주관하는 절대 권력이 필요할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가 경제 지상주의로 치닫는 것을 잠시나마 되돌아 보도록 하는 데는 폴라니와 같은 몽상가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마치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 양 사람들이 현혹된다면 이는 몽상가들이 주는 폐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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